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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와 참선이란?
 금강선원  | 2007·07·26 15:14 | HIT : 4,567 | VOTE : 445

화두와 참선이란?

 

 

화두(話頭)는 참선할 때에 필요한 것으로 의심된 생각이며 이 생각하는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크고 의심이 없이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참선을 통하여 할 수 있는 견성법입니다. 옛 조사로부터 중중(重重)히 베풀어놓은 1700여 가지의 화두 공안이 있는데 예를 들면,

시심마?: 가고 오고 말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의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고?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 만가지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는 종류의 화두가 있습니다.

 

참선(參禪)은 본래의 자기 성품(自己性品)을 보는 견성(見性)을 하기 위한 최상의 수행방편으로 꼭 좌선만 하는 것으로 참선을 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화두를 놓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의심을 지속 시켜 나간다면 참선수행(參禪修行)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석존의 제자가 되려면 석존의 구속으로부터라도 해탈해야 합니다. 이를 단적으로 말하자면 너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 할 것이며 그 밖에 다른 어떤 것에도 귀의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며 참나를 위대한 스승으로 공경하며 저를 따르지 말고 너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깨우치심입니다.

대체로 공부에 장애되는 것은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하는 것이 큰 병통이며,또한 아는 것이 큰 병통이며,간절한 마음이 없는 것이 큰병통입니다. 다만 화두를 의심하는 것밖에는 터럭 끝만큼이라도 다른 생각을 두어서는 안됨니다. 설사 화두에 의심을 얻었을지라도 지견에 빠지면 병이 됨니다. 고요함이 극한즉 문득 깨치고 깨끗함이 극한즉 광명이 통달되나니,기운이 엄숙하고 바람이 맑아 동정경계가 맑은 가을 하늘 같을 때가 첫 번째 절차요.

이럴 때에 화두를 더욱 잘 잡아 앞으로 나아가면 맑은 가을 물같으며 옛사당사당에 향로와 같아서 적적성성하야 마음 행하는 길이 끊어질 때에 육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고 다만 화두에 의정만 있을 뿐이니 점점 승하면 티끌이 녹아지고 광명이 장차 발현 할 것이니 이것이 두번째 절차요.

만일 이곳에서 지각심을 내면 순일함이 끊어지리니 크게 해로움이 됨니다. 이 허물이 없이 공부를 지어 앞으로 나아가면 동정이 한결같고 자나깨나 성성하여 단지 화두만 나타나는 것이 비유컨대 물속에 비친 달이 파도에 흔들려도 흩어지지않고 없어지지 아니한 것과 같아 중심이 고요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며 천만 경계가 분잡하고 떠들석해도 動(동)치 아니하나니 이것이 세 번째 절차입니다. 이와같이 될 때 크게 깨우칠 때가 가깝습니다.

 

참선 공부법 비유

 

참선 공부하는 법을 비유해 말해 보겠습니다.
산중에 황금으로 된 소가 한 마리 있는데, 이 소를 잡아 내면 행복하게 살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첩첩산중에서 소 발자국의 흔적을 발견한 뒤,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소를 만나면 잡으러 좇아가는데, 잡으러 가는 사람도 힘들지만 쫓겨 가는 소도 불리하여 은신처를 구하다가 필경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돌아서 최후로 발악합니다. 이때 상대편도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용맹정진하여 상대편이 승리를 거두는 것이 견성법입니다. 곧 화두당처(話頭當處)가 소의 발차국인 동시에 불성자리입니다.

황금소를 악업으로나 선업으로 잃어 버려도 결국에는 생사를 면치 못합니다. 예를 들면 송아지를 잡아야 항복 받고 자유 생활을 할 터인데, 노름이나 외도처럼 나쁜 일을 하다가 소를 잃어 버리거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살려 주다가 곧, 좋은 일을 하다가 소를 잃어 버려도 결과적으로 모두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일에 속아선 안 돼요. 세상일은 거짓으로 멋지게 연극하고 모든 반연을 끊어요. 착한 일도 옳은 일도 그른 일도 돌아보지 말고 오직 '이 뭣고'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 몸 받기 어럽고 또 만나기 어렵습니다. 천하를 돌아봐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은 없습니다. 부처님도, 문수보살도, 관세음보살도 나를 도와 주지 않습니다. 내 죄는 내가 풀어야지 의지할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러니 후회 말고 운수납자가 일도양단(一刀兩斷)하여 크게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아야 합니다.

화두공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부 짓는 법, 그 길을 화두결택 이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법을 가린다 그 말입니다. 공부하는 바른 법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이 '공부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물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공부하는 법을 모르면서 절에 다니고, 철야 공부를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공부하는 법은 의심없이 알아야 합니다. 서울에 갈려면 서울 가는 길을 바로 아는 것이 제일 큰 문제 아닙니까. 서울 가는 길도 모르면서 남대문을 찾고, 동대문 시장은 어떻게 벌어져 있고, 제일극장은 어떻고, 요릿집은 어디고 하면서 말만 많습니다. 서울에 가지도 않으면서 말만 벌여 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배고플 때 그림의 떡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의심이 나면 묻고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그렇게 헛고생을 하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화두 공부가 수월한 것 같으면서도 어렵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이 '이 뭣고' 하니, 천하에 쉽지 않습니까.
화두(話頭)라는 것이 조사공안(祖師公案)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공부하게 하기 위해서 문제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설파한 것입니다. 불법의 종지, 골수를 바로 일러주는 말입니다. 일러줄 때 바로 알면 공부할 일이 없어집니다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주인공)을 '이 뭣고'할 때는 모르거든요. 모르니 의심을 안 낼 수 있습니까. 부를 때에 '이 뭣고'하고 부르기만 했지 부르는 것(주인공)을 모릅니다.

앞에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있기 때문에 알기 위해 '이 뭣고'가 나오게 되고, '이 뭣고' 할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을 부르듯 '이 뭣고'를 한다면 억만 년을 해도 소용 없습니다. 문제를 알려는 것이 목적이지 소리 자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화두마다 끝에 '이 뭣고'가 붙습니다. 알려고 의심을 내는데, 세상의 공부인 과학이나 철학공부처럼 사량분별로 따져서는 안됩니다. 따지면 도(道)공부가 아닙니다.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인가?' 그렇게 분별심을 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따집니다. 그렇게 공부한다면 엉터리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압니까.

'내가 마음이니, 사람들아 나보고 마음이라고 불러라' 그런 예는 없었습니다. 서로 통하고 살려니까 마음이니, 사람이니 개니 부처니 차별을 두어 이름을 지어 놓았을 뿐이지, 부처도 개도 사람도 마음도 아닌 것입니다. 말이나 글자는 허망할 뿐 실물이 아닙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 소식을 알기 위한 것이 화두인데, 따져 알려고 해선 안됩니다. 억만 년을 따져도 모릅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미묘법입니다.

부르는 것이 대관절 무엇인가 ?

공부를 하라는 대로하면 물동이가 깨지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분별심으로 공부를 하면 억만년을 해도 화두를 타파하지 못합니다. 세상일이 아니기 때문에 재미도 없고 알래야 알 수 없는 한 대목, 한 구멍으로만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단지 모르는 대목만 딱 붙잡고 '이 뭣고'하면서 알려고 해야지, 그냥 '이 뭣고, 이 뭣고'만 하면 억만 년을 공부해도 소용없습니다.

알려고 하는 생각은 내되 따지려고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놈이 마음인가, 입인가, 목구멍 속에서 혹은 머리 속에서 나오는가' , 이렇게 따져 말려고 하면 허공이 다 하더라도 헛 공부만 하게 될 뿐 도(道)공부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공부를 했어도 아무 재미도 없고 알래야 알 수도 없고, 또 모르지 않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는 공부입니다. 공부를 해도 생기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답답하니, '내가 공부할 줄 모르는 것인가' 또는 '가르치는 스승이 허물이 있는 것인가' 하고 따집니다. 하라는 대로 하면 될텐데 그렇게 따집니다. 따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가장 귀중합니다.

바늘 끝이 날카로우니 어디든 쏙 들어가지 않습니까. 따지지 말고 한 구멍에만 대고 파고 들어가야지, 여기 저기 대어 보면 몽둥이로 바느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모르는 대목만 즉 알려고 하는 것만 파고 들어가십시오. 금을 캐는 광부들이 금맥을 보고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금이 발견되기 전, 파고 들어갈 동안은 광부들이 고생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금을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오늘도 파고 내일도 파고 해야지 다른 수가 없지 않습니까. 공부도 그와 같습니다. 안된다고 하지 말고, 따지지는 말고, '이 부르는 것이 대관절 무엇인가'하고 알려고 하면 마음이 거기서 딱 한 덩어리가 됩니다. 따지기 때문에 마음이 이리 나가고 저리 나가서 마구니, 잡신이 붙는 것이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마구니도 붙을 새가 없습니다. 몰라 답답한 데에만 대고 '이 뭣고?' 공부를 지어가면 마구니도 덤빌 수 없고 방해가 생길 곳이 없습니다.

분명히 몰라야 크게 깨달을 수 있다.

마음을 이리 한번 저리 한번 돌리면 마구니가 덤벼 버립니다. 마구니가 속여 먹을려고 그 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합니다. 하늘을 쑤실 용기가 나고 누구 뭐래도 내가 제일인 것 같은 용기가 막 납니다. 조금 공부를 하다 보면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법담도 나누고 게송을 만들고 싶기도 한데, 그것은 마구니가 시켜서 그런 것이지 내 마음이 아닙니다. 공부는 알아지는 것은 그만두고 들어갈수록 깜깜해져야 합니다. 분명히 몰라야 크게 때달을 수 있는 분(分)이 있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알음알이가 있는 사람은 깨달을 분이 없습니다. 힘이 뭉치지 않으니 깨쳐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몰라야 합니다.

아는 것이 있으면 화두가 들리지 않습니다. 화두가 크게 불덩이처럼 뭉쳐지질 않습니다. 안다는 생각이 화두의 기운을 뺏앗아 가기 때문에 화두가 뭉쳐지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마구니들이 공부를 못하게 하려고 조화를 부립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늘의 별도 보이고, 해도 보이고, 오십 리 밖에서 누가 나를 찾아온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도인줄 아는 사람들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 욕심에 오십 리 밖에서 누가 온다, 무슨 일이 생긴다, 그런 것을 알게 되면 재미가 있어 써먹고 싶거든요. 조그만 살림살이에 호기심이 생겨 그런 일이 또 있으면 좋겠다,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완전히 마구니 권속이 됩니다.

마구니는 기분 좋게 만들다가도 언젠가는 골탕을 먹입니다. 구덩이에 데려가 떨어져 죽게 하기도 하고, 손가락도 잘라지게 하고, 또 공부하다 보면 마구니가 심통이 있어서 나를 따라 극락세계에 가자고 부릅니다. 마구니의 신통력으로 구덩이 골짜기가 전부 대로로 보인답니다. 낭떠러지가 큰 신작로로 보여 따라가다 죽어 버리게 되는 겁니다. 스승 없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토굴에 가더라도 이런 상식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많은 사람들은 공부하는데 장애가 많습니다. 복이 없으며 마장이 생겨 공부도 못합니다. 본인들은 마구니들이 공부를 뱡해하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 수행자도 그렇습니다. 이 스님은 여자를 좋아하는지, 먹는 것을 좋아하는지, 무서워하는 것을 싫어하는지 , 그런 것을 보아 공부를 방해한답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마구니들이 시간 시간 우리를 따라다니며 마장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 기분 나쁜 일이 있어 공부하지 못하면 마구니가 방해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집안이 망해도 공부하겠다 하고 공부하면 방해를 못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끓는 물 속에는 파리나 모기가 덤비질 못하지 않습니까? 망상을 피우지 않고 화두를 들면 마구니는 물론 염라 국에서도 나를 잡아가지 못합니다.

마음을 버리는 공부가 화두 공부인데 복을 지었다, 착한 일을 했다는 상(相)을 내면 귀신들의 종노릇을 면치 못하고 자신은 죽습니다. 나고 죽는 괴로움을 면치 못할 뿐더러, 망상으로 살기 때문에 귀신의 권속이 되어 버립니다. 마음을 비워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니 우습습니다. 저 사람도 송장, 나도 송장, 저 사람도 허망하고, 나도 허망하고, 다투는 일도 허망한데 이겨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세상일은 송장들이 시시한 물건을 가지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바깥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을 비워라' 하는데 그렇다면 이 몸을 가지고 살 수 없지 않느냐?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기는 하되 하는 일없이 하라' 그 말입니다.

밥을 먹어도 욕심으로 먹지 말고 공부하기 위해서 먹고, 가도 가는 것 없이 가고, 살아도 공부 하기 위해서 살아야지 도둑놈 도와주어 이익 되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리 먹어 봐야 늙기만 하고 똥 쌀 일만 있습니다. '먹기 위해 돈을 버는데 안 먹고 뭐하느냐?' 그런 답답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도를 닦으려, 주인을 찾으러 왔습니다. 또 반대로, 지난날 지은 죄를 받으려 왔습니다. 그러니 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이런 몸을 받아 오지도 않았습니다.

죄를 받는 그릇이 몸인데, 어찌 죄를 받지 않으려고 합니까? 인연 따라 살면서 우리가 할 일은 부지런히 내 마음을 찾는 도를 닦는 일입니다. 이런 이치를 알면 하나도 부러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굴 잘 생긴 사람,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 유식한 사람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세상 지식을 배워 아는 것은 유식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속아 얽혀 살고 있습니다. 죽었다 깨도록 배워도 아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 천(天)하면 하늘이 어떻게 생긴 줄 알 것입니까? 눈으로 보는 하늘이 하늘입니까? 따지(地), 땅에도 한량없는 이치가 많은데 따 지 해서 땅 소식을 어떻게 압니까? 마음 심(心)해서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억만년을 배워도 배워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는 이치를 아는가?

그러니 남을 부러워할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박사라는 사람들도 자기 일에 대해서 십분의 일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만두고 눈 깜짝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밥을 왜 먹어야 하는지 그 이치를 모르는데 무엇을 안다는 말입니까. 자기 분야에서, 허망한 꿈속에서 배운 것을 안다고 시비를 할 뿐 하나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말만 있지, 참 행복은 없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돈이 있어도 내 마음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듭니다. 무선전화가 있고 텔레비전이 있어도 복잡하고 일만 많지 않습니까. 자동차가 있으니 서울로 부산으로 왔다갔다 분주하기만 합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 바쁘고 괴로운 일만 있습니다. 어찌 이런 것을 모릅니까. 스님네 들은 법복 하나, 바릿대 하나, 지팡이 하나가 살림살이의 전부입니다. 그 밖에 아무 필요가 없어요. 바릿대 하나 있으면 어디 가서도 밥을 얻어먹을 수 있고, 법복을 입고 있으면 인증을 받으니 절에 가 한 철 지낼 수 있으니 이 세 가지 말고는 소용없다 하고 저장을 안 하는 스님네 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야 도가 성하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에 속지 않고 살면 허물이 없습니다. 큰절을 맡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감투를 쓴 스님 네를 부러워하고, 법문을 잘하는 스님네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공부 하나 잘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아무 필요 없습니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남을 부러워 할 일이 없어집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살길을 만났는지 만족하고 감사한 생각이 납니다. 사람이 곧 죽을 것 같아도 죽지 않습니다. 제석천왕이 착한 사람을 위해서 이런 원을 세웠답니다. 전생에 복이 없어 입고 먹을 것이 없을 팔자를 타고났더라도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입을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죽어 버리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배고파 죽어 버리고, 집이 없으면 얼어죽어 버리고, 되는대로 살아야겠다 그런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옷도 주고 집도 주고 다 주겠다고 원을 세웠답니다. 우리가 나올 때는 인과에 따른 죄를 받으러 왔겠지만 먹고 입을 것을 다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에 지나치게 신경쓸 것 없고, 인연 따라 공부만 잘 하다가 가야겠다 생각하면 하나도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마음을 바늘 끝처럼 만들어 파고 들어가라.

 

공부를 지어 가는데, 분별심을 내지 말고 알래야 알 수 없는 대목, 재미도 없는 대목을 향해 마음을 바늘 끝처럼 날카롭게 만들어 '이 뭣고'하고 파고 들어가는데, 물 흘러가는 것처럼 끊일 사이 없이 들어가면 도가 나오지 않은 수 없습니다. 서울 가는 길을 가는데 내가 가면 어찌 서울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공부는 미묘법이고 비밀법입니다. 세상공부와 공식이 달라 격외선이라고 합니다.

도 닦는 데에만 이런 특수한 법이 있지 세상에는 이런 공식이 없습니다. 과학이나 철학은 상대가 있지만 이것은 상대가 끊어진 곳으로 들어갑니다. 분별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똥파리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므로 공부하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이 공부는 진실하고 참다워야 합니다.

제일 공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어중간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알려면 분명히 알든지 모르려면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할 사람, 소금을 가지고 물에 들어가라고 하면 이것이 법인가 보다 할 사람, 이런 사람이 실수없이 도를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간 치기는 백여시처럼 이리 한번 저리 한번 따져 보기 때문에 도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미련한 사람이 도에 들어 가기 쉽답니다. 꾀를 낼 수 없고 시키는 대로만 하니까 바로 도에 들어갈 수 있답니다. 이렇게 말해도 여러분은 백여시 노릇을 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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